고대의 신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신이 있었는데, 그는 인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우선 땅을 차지하고 있는 신을 찾아가 육체의 재료인 흙을 얻었다. 그러나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는 아직 생명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혼을 관장하는 신을 찾아가 영혼을 얻어서 인간에게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흙과 영혼을 빌려 준 신들이 대단치 않게 여겼는데 막상 인간이 완성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저마다 인간을 소유하겠다고 다투다가 마침내 재판관에게 판결을 내려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재판관은 세 신을 모두 만족시키는 판결을 내렸는데, 그 판결이 곧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

"인간이 죽으면 흙을 빌려 준 신은 그 육체를 되돌려 받고, 영혼을 빌려 준 신은 그 영혼을 도로 차지하라. 그러나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걱정의 신이 소유하라."


  인간의 삶은 온갖 번민으로 얼룩져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번민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예수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모두 나에게로 와서 안식을 얻으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온갖 번민은 따지고 보면 존재의 유한성에서 온다. 바로 그 유한성의 절정은 죽음이다. 서양 사람들의 공동묘지는 우리와는 달리 흔히 시내 한복판에 있다. 자주 발견되는 묘비명 가운데 하나는 "오늘은 나의 차례, 내일은 너의 차례"라는 말이다. 공동묘지는 방문한 산 사람에게 죽어서 누워 있는 사람이 주는 충고인 것이다. 서양인들의 집 거실에 놓인 괘종시계에는 "그대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 어 글귀가 새겨 있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보게 되는 괘종시계에 이 말을 새겨 둠으로써 서양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성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한복판에서도 실은 죽음 가운데에 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나 다만 그 시간이 불확실할 뿐이다.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날짜는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또 현재의 의료 기술로는 치유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이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러한 시한부 인생을 다룬 영화나 소설을 보고 읽으면서 주인공의 삶과 채 이루지 못한 여려 가지 일들, 그리고 곧 닥쳐 올 이별을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남의 죽음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도 언젠가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 간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루하루 죽어 간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그 종착역으로 무자비하게 몰고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착역으로 내몰리지 않고 변화나 소멸을 겪지도 않고 한결같이 존재하는 영역을 꿈꾸어 왔다. 이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간절한 바람이 종교가 탄생한 배경이다. 종교의 세계는 이성만으로는 결코 미치지 못하며, 오직 자아를 절대자에게 완전히 귀이시킴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유한한 존재이자, 그와 동시에 그 유한성을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종교적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은 모든 비극의 원천이면서, 한편으로 현재의 삶에 애정을 갖고 더 가치있는 것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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